사회,시사,유머

5월의 모란 열사

또리아빠 2010. 5. 4. 15:46

  

 

유구영  
  (1956년~1996년)   당시 39세 노동열사
 
1957년 출생
1978년 청주고등학교 졸업
1981년 고려대 행정학과 졸업, 한국신학대학원 입학
1988년 영등포 기계공단 노동조합 사무국장
1990년 대한 중전기 분회장
1993년 서울지역 노동조합 협의회 정책실장
1995년 민주노총 정책기획실 정책부국장
1996년 5월 2일 새벽 2시 25분경 동지들과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간암으로 운명
 
동지는 ’78년 청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 행정학과에 입학하였고 대학에서 유신체제의 모순을 인식하고 ’81년 졸업과 동시에 노동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간암 중기의 하늘이 무너지는 선고가 내려지기 전날 밤에도 동지는 민주노총의 핵심적 과제 중의 하나이면서 동지의 최대 관심사의 하나였던 노동자 정치세력화 방안을 새벽 4시까지 정리했다. 동지가 민주노총의 정책기획국 부국장으로 활동하며 꿈에도 염원하는 민주노총 건설이 실현되고, 자신의 땀이 밴 그 조직이 이제 막 새롭게 활동을 펼치려던 참이었던 ’96년 5월 2일, 그의 병세가 악화되어 여러 번의 입원과 치료에도 불구하고, 결국 동지는 새벽 2시 25분경, 아직 채 못 피운 서른아홉살의 짧은 생애로 운명하였다.

 

 

천세용  
  (1971년~1991년)   당시 20세 학생열사
 
1971년 5월 서울 출생
1990년 서울 동북고 졸업
경원대학교 전산과(2부) 입학
1990년 3월 경원대힉교 민족사 연구회 ‘한얼’에서 활동
1991년 5월 3일 오후 3시경 ‘강경대 학우 폭력 살인자행한 노태우 정권 타도를 위한 결의대회’
도중 분신 후 투신하여 운명
 
동지는 어려운 집안사정으로 인해 낮에는 일용직 건설노동자, 세차장 등의 아르바이트를 해 등록금과 생활비를 마련하고 밤에는 야간강좌를 들으면서도 누구보다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 당시 동지는 강경대 치사사건과 박승희, 김영균 동지의 분신으로 전국적으로 규탄집회가 잇따르는 가운데서도 경원대 학생들이 축제와 체전 분위기에 들떠 집회에 참석하는 수가 점차 줄어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동지는 이같이 어려운 학교 상황에서 학생들을 깨우쳐 일으킬 수 있는 방법들을 고민하게 되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결론을 내렸다. ’91년 5월 3일, 동지는 ‘노태우 정권 퇴진을 위한 4만 학도 결의대회’가 시작되자 국기 게양대 난간에서 신나를 뿌리고 몸에 라이터를 갖다댄 뒤 “6천 경원대 단결 투쟁 노태우정권 타도하자”고 외치며 6m아래 바닥으로 뛰어내렸고 끝없는 민중 사랑을 온몸으로 보여주며 산화해갔다.

 

 

김종수  
  (1966년~1989년)   당시 23세 노동열사
 
1966년 3월 21일 전북 장수군 출생
1979년 빈암 중학교 입학, 3년중퇴
1985년 서울 상경 동대문 시장에서 재단사로 일함
1988년 7월 31일 (주)서광구로공장에 입사
1989년 1월 쟁의부장 임명
1989년 4월 18일 노동운동 탄압분쇄, 임금인상 완전쟁취, 서광 구로지구의 독자적 운영 쟁취
등을 내걸고 파업시작
1989년 5월 4일 오후 1시 15분경 회사측의 탄압에 맞서 “무노동 무임금 철폐”
“민주노조 사수” “동지들을 탄압하지 말라”고 외치며 분신
밤 11시 30분 영등포 한강성심병원에서 운명
 
서광노동조합은 ’88년에 부평과 구로의 통합대의원대회를 열었고, 이때 선출된 부평공장 출신 위원장은 구로지부 집행부를 꾸리지 않았다. 이에 구로지부 조합원들은 조속히 꾸릴 것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5월 3일 회사 측과 협상한 결과 ‘쟁의기간 임금 90%이상 지급, 민형사상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 노조간부 3인에 대한 징계처리를 최대한 가볍게 한다’고 약속하였으나 다음 날에 약속을 번복하여 협상이 결렬되었다. 당시 쟁의부장이던 동지는 이에 격분하여 “민주노조 사수하자” “셋방살이 노동자의 서러움은 싫다” “동지들을 처벌하지 말라”고 외치며 분신하였다. 동지는 이날 밤 11시 30분경, 차마 눈을 감지도 못한 채 공안정국의 ‘무노동 무임금’ 논리와 회사, 본조의 지부탄압에 온몸으로 항거하며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갔다

 

 

김기설  
  (1964년~1991년)   당시 26세 사회운동
 
1965년 경기도 파주 출생
1983년 인천 수도전기통신고 중퇴
1984년 대입검정고시 합격
1988년 성남 민주화청년운동연합 가입
1989년 성남 노동자의 집에서 상담간사로 활동
1991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본부 사회부장으로 활동
1991년 5월 8일 서강대 본관 옥상에서 “폭력살인 만행 노태우 정권 타도하자”고 외치며 분신한 후 투신하여 운명
 
동지가 운동에 접하게 된 것은 ’88년 9월 성남 민청련 창립대회에서 김근태씨의 강연을 듣고서부터이다. ’91년 1월부터 전민련에서 사회부장으로 일하게 된 동지는 궂은 일, 드러나지 않는 일을 도맡아 했다. 속초 동우전문대 사건이 터지자 누구보다 먼저 현장에 달려가 외롭게 투쟁하던 학생들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 또한 노동자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신뢰를 갖고 있던 동지는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의 곁에서 그들의 아픔을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며 헌신적으로 그 일에 뛰어들어 원진레이온 사태가 사회 쟁점화 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노태우정권의 반민주적, 반민중적, 반민족적 폭압을 새삼 인식하였다. 동지는 강경대 동지의 죽음 이후 범국민 대책회의에 참가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던 중 분신을 결행하였다

 

 

고정희  
  (1960년~1988년)   당시 28세 사회운동
 
1960년 12월 4일 전남 광주 출생
1979년 3월 연세대 전기공학과 입학
1981년 육군입대
1986년 1월 연대 전기공학과 졸업후 IBM입사(호주 파견근무)
1987년 3월 퇴사 후 연대 정외과 편입학
1987년 10월~12월 김대중 후보 당선을 위한 청년, 학생 단체인 민족통일애국청년단
중앙본부 기획위원회에서 50여일간 숙식하며 활동
1988년 1월 이후 청와대, 미대사관, 각 언론기관에 부정선거에 관한 투서 및 미대사관에 투석 계획
1988년 3월 서초 경찰서 대공과에 연행 후 정신병원에 강제수용
1988년 5월 13일 병원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함
 
’88년 1월 이후 청와대, 미대사관, 백악관, 독일대사관 등에 ‘노태우 부정 집권’을 고발하는 투서를 한 동지는 ’88년 3월 서초 경찰서 대공과 직원 2명에 의해 연행되어 ’87년 대통령 선거가 부정선거라는 내용의 투서를 청와대 등에 보낸 경위 등을 조사받았다. 동지는 조사를 받던 중 은평구의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입원되었다가 이후 강남 성모병원에 옮겨져 치료를 받던 중 5월 13일 오후 5시 40분경에 병원 건물에서 떨어진 채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동지의 가족들은 연행된 경위와 정신병동에서 치료받는 과정 등이 자살로 보기 어렵고 경찰 조사를 받던 중 정신 병원에 강제 입원조치 되었고 유서가 발견되지 않는 등 자살 징후가 없었으며, 사고 현장 목격자가 병원 관계자 외에는 없는 점, 사고현장이 제대로 보존되지 않고 추락지점에 혈흔 등이 별로 없었던 사실을 들어 의문을 제기하였다. ’01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진상조사를 하였으나, 아직 진상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배동복  
  (1963년~1999년)   당시 36세 노동열사
 
1963년 5월 인천 출생
동인청중학교 졸업, 정석 고등학교 중퇴
1991년 롯데기공 입사, 풍물패 활동
1996년 8월 영창악기 입사
풍물패 ‘어울림’ 창단, 초대 회장 역임
1999년 5월 17일 사고로 운명
 
동지는 인천 덕적도 섬에서 태어나 동인천 중학교 졸업하고 정석고등학교를 중퇴한 후 양은을 만드는 공장을 다니면서 일찍 노동자의 삶을 시작했다. 동지는 ’91년 초 ‘롯데기공’에 입사해 풍물과 인연을 맺고 관리자의 부당한 횡포에 맞서 싸우다가 5년 8개월만에 롯데기공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 후 ’96년 8월에 영창악기에 입사해 8대 집행부 초기에 ‘어울림’ 풍물패를 만들어 초대 풍물패장으로 활동하면서 민주노조 건설에 큰 역할을 하였다. 짜증한번 안내고 항상 웃는 모습으로 생활하던 동지는 ’99년 5월 17일, 퇴근길에 과속으로 달려오던 덤프트럭에 치어 장파열로 인해 병원으로 실려 가던 중 목숨을 거두었다.

 

 

김진수  
  (1949년~1971년)   당시 22세 노동열사
 
1949년 7월 6일 전북 임실군 장사면 출생
1967년 12월 안양고 2년 중퇴
1968년 8월 15일 (주)한영섬유 입사
1970년 12월 31일 공장에서 노조파괴를 목적으로 폐업한다는 말에 자진사퇴
1971년 1월 4일 한영섬유에 재입사
1971년 3월 18일 노동조합을 파괴하려는 구사대에게 피습 당해 사경을 헤맴
1971년 5월 17일 운명
 
당시 (주)한영섬유는 서울시에서 할당한 수출 초과달성으로 많은 이윤을 남겼으나 노동자들에게는 수건1장이 고작이었다. ’70년 12월 28일 점심시간 식당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사측은 노동조합을 무력화 시키기 위하여 공장가동을 일시적으로 중단하고 위장폐업으로 노동자 200명을 해고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사측은 동지를 말 안듣는 노동자로 분류하고 주시하였다. 매수된 구사대는 3월 18일 오후 3시경 일과시간 중 만취상태로 동지와 동료를 폭행했으며, 노조 일을 적극적으로 하던 동지를 불러 노동조합 탈퇴를 강요하였고 이에 불응하자 드라이버로 머리를 쳐 의식을 잃게 만들었다. 병원에 이송된 동지의 상황에 대하여 제대로 의사에게 알려주지 않고, 사건을 숨김으로서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고 동지는 5월 17일 운명하였다

 

 

김순조  
  (1964년~2001년)   당시 36세 노동열사
 
1965년 전남 구례군 산동면 출생
1985년 안양에서 현장생활 시작
1988년 삼양통상에서 노조민주화 투쟁과정으로 첫 해고를 당함
안양지역노동자회 활동 시작
1989년 한영알미늄 현장에서 산재사고로 손가락 절단됨
1992년 안산한벗노동자회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
안산지역 노동자산악회 ‘산을 찾는 사람들’ 창립 발기인
안산지역 노동자 축구단 ‘해맞이’ 창립발기인
1993년~1994년 우르과이라운드-WTO반대와 쌀 및 기초농수산물 수입개방 반대투쟁 전개
94년부터 안산지역 노동자통일대 ‘한라’대 현장분대장으로 범민족대회 참여
1994년 태양금속에서 세 번째 해고
1995년 창흥정밀 입사. 대의원과 부위원장 역임. 사무국장으로 활동
경기지역 노동자통일실천단 활동
2001년 5월 18일 임단투 승리를 위한 부서별 족구대회 준비를 위하여 족구장을 만들다 지게차에 치여 운명
 
삼양통상에서 노조민주화투쟁을 하다 해고를 당한 동지는 그 과정에서 만난 동지들과 함께 안양지역노동자회 활동을 시작했다. 그 뒤 현장에서 산재사고로 손가락이 절단되는 사고가 있었지만 안산으로 이전하여 ‘안산 한벗 노동자회’, 노동자 산악회 ‘산을 찾는 사람들’, 안산지역 노동자 축구단 ‘해맞이’등 안산지역 노동자들의 조직화와 통일투쟁에 앞장섰다. 동지는 이후 태양금속에서 세 번째 해고당한 뒤 창흥정밀에 입사하여 노조민주화를 위해 앞장섰다.
세 번이나 되는 해고투쟁 속에서도 꿋꿋하게 동지를 일으켰던 것은 “공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사랑하는 동지들 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동지들에 대한 사랑이었다.

 

 

한경석  
  (1962년~2002년)   당시 40세 노동열사
 
1962년 1월 28일 충남 논산 출생
1988년 신광전자 노조 설립. 초대위원장
1989년 부천지역 임금인상투쟁본부 본부장
1989년 4월 18일 집시법, 제3자 개입금지 등 악법으로 1차 구속
1989년 부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 1대 의장
1990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부위원장
부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 2대 의장
현대중공업 연대 총파업으로 2차 구속
1991년 ~ 1994년 부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 3, 4 6대 의장
1995년 복직 투쟁 승소로 신광전자 복직
1999년 12월 여의도 성모병원에서 백혈병 진단
2002년 2월 27일 민주노동당 부천원미갑지구당 지도위원, 후원회장
5월 21일 5시 운명
 
동지는 현재 부천시흥 민주노총의 모체인 부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를 8년이라는 긴시간 동안 투쟁적인 조직으로 일구고 사수했던 부천노동운동사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지도자이자, 운동가였다. 지역노동자들의 단결과 연대를 위한 열정적인 활동으로 동지는 부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를 결성하고 8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지역의 노동운동발전을 위해 쉬지 않고 투쟁해왔다. 그러나 지역의 투쟁사업장마다 찾아다니며, 공권력의 투쟁에 맞서기 위해 밤을 새며 고민하고 활동하던 과정에서 자신의 몸을 돌볼 여유가 없었던 동지에게 무서운 병마가 찾아들었다. 동지들의 간절한 바램을 뒤로하고 동지는 결국 ’02년 5월 21일 5시경 운명하였다.

 

 

고정자  
  (~1993년)   당시 ??세 노동열사
 
1978년 원진레이온 입사 후 처리 정련과에서 15년간 근무
1991년 직업병 증세 발견
1993년 5월 21일 직업병으로 운명
 
동지는 ’78년 원진레이온 정련과에 입사하였는데, 장기간 근무로 인해 팔다리가 마비되고 우울증세와 함께 성격변화 등으로 큰 고통을 받았다. 원진레이온은 직업병과 산업재해가 많은 사업장으로 유명한 사업장이었다.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은 매년 특수건강검진 결과 정상 판정이었다가, ‘91년 원진레이온 전·현직 노동자 1,500명에 대한 역학조사결과 한 가지만 직업병으로 발견되었다. 의학적으로는 직업병이었고 법률적으로는 정상으로 판정되어 1년 간 방치되는 과정에서 증세가 더욱 악화되어 직업병 증세인 정신분열로 자살하게 되었다.
사망 이틀 후 노동부는 이를 직업병으로 인정치 않음으로써 수많은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조정식  
  (1964년~1989년)   당시 25세 노동열사
 
1964년 1월 17일 대구 수성구 출생
1982년 서울대 물리학과 입학, 학생운동에 투신
1984년 7월 인천 범아산업 취업
1986년 5월 인천 진도에 입사하여 노동운동 시작함
1987년 11월 반제동맹사건으로 구속, 3년형을 선고
1989년 5월 10일 영전기계에 취업
1989년 5월 24일 오후 3시경 공장에서 산업재해로 운명
 
동지는 ’82년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하여 학내 써클인 ‘물리과학회’와 ‘사람과 과학’에 가입하여 일본교과서 왜곡사건과 전두환 군사정권 반대 집회등에 적극 참여하였다. 노동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동지는 ’84년 학교에서 제적된 뒤 인천의 범아산업과 (주)진도에 위장취업하여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등 노동운동에 투신하였다. ’87년 9월 5일 국가보안법위반, 소요, 집회 및 시위법 위반으로 징역3년을 선고 받고 순천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하였다. ’88년 8월 14일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다시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 ’89년 5월 10일 서울 성동구의 영전기계에 위장취업하여 현장에서 노동운동을 하고자 하였으나 5월 24일 3시 반경 드릴작업을 하던중 동지 뒤에서 작업하던 선반공이 시간에 쫓겨 선반의 속도를 높이는 순간 공작물 균형을 위해 고정시켜 놓았던 기계으 바란스용 중심추(약 30kg)가 튕겨 나와 동지의 뒷머리를 때려 병원으로 옮기던 중 운명하였다.

 

 

김귀정  
  (1965년~1991년)   당시 26세 학생열사
 
1966년 서울 출생
1985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용인캠퍼스에 입학하였으나 집안사정으로 중퇴
1988년 3월 성균관대학교 불어불문학과 입학, 심산연구회 가입 활동
1989년 심산연구회 회장 역임
1990년 동아리 연합회 총무부장 역임
11월 동아리 연합회 부회장 출마
1991년 5월 25일 ‘공안통치 민생파탄 노태우정권 퇴진을 위한 제3차 범국민대회’에 참가하여
시위 도중 대한극장 부근에서 백골단의 토끼몰이식 진압에 의해 운명
 
동지는 대학 입학 후 ‘심산연구회’ 활동을 통해 조국과 민중을 고민하는 책임 있는 운동가로 삶을 실천하던 중 백골단의 무자비한 진압에 의해 운명하였다.
’91년 5월 25일 ‘공안통치 민생파탄 노태우정권 퇴진을 위한 제3차 범국민대회’에 참여하기 위한 시민 학생 등이 대한극장 주변에 약 1만 여명이 집결하였다. 이후 시위대는 3만 여명으로 늘어났고 5시 20분경 전경과 백골단이 페퍼포그를 앞세우고 엄청난 양의 최루탄을 쏘며 시위대를 3방향에서 포위공격을 하였다. 이날 동원된 경찰은 15개 중대 1천8백여 명이었고 이 때 10분동안 경찰이 사용한 최루탄의 양은 다연발 1백60발, 사과탄 1백14발 KP탄 6백72발 등 모두 9백46발이었다.

 

 

김상원  
  (1957년~1986년)   당시 33세 노동열사
 
1957년 5월 7일 출생
1986년 3월 10일 영등포에서 불신검문에 항의하다가 연행됨
1986년 5월 26일 식물인간으로 투병생활 중 운명
1990년 12월 민사소송에서 경찰의 유죄가 인정됨
 
동지는 ’86년 3월 10일 근로자의 날을 맞아 당시 영등포 산업선교회에 집결해 있던 노동자들이 영등포로터리까지 진출해 벌이던 대규모 노동자 가두데모 직후 경찰관들이 비상 순찰 중이던 상황에서, 집으로 가던 중 불심검문을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중앙파출소로 불법적으로 강제 연행되었다. 중앙파출소에서 그곳 소속 경찰관들로부터 전신을 폭행당하여 피투성이가 되어 식물인간이 된 채 영등포경찰서에 의해 영등포 시립병원에 행려환자로 위장, 입원되었다. 영등포경찰서 및 중앙파출소 경찰관들의 철저하고도 조직적인 은폐아래 중환자실에서 77일간을 신음하다 5월 26일 33세의 젊은 나이로 운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