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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년 5월은 이 땅의 반외세, 반독재, 반독점 투쟁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다. 4월 들어 성대의 전방입소거부 투쟁으로 점화된 불꽃은 서울대의 전방입소 거부 투쟁, 의대 도서관 점거기도로 이어졌고 5월에 들어서는 5.3 인천항거, 부산 미문화원 점거, 한미은행 점거 등 투쟁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 와중에 서울대의 김세진, 이재호, 이동수, 박혜정 열사가 분신, 투신으로 죽어갔고 동지는 그들의 죽음을 지켜보며 그들이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근본원인이 무엇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원인이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는 미·일 외세와 이에 영합하여 민중을 탄압하고 착취하는 군사독재정권 및 매판 독점자본이라는 결론을 얻어내게 되었다.’67년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대성학원에서 대학입시를 준비하던 동지는 ’86년 6월 서울 청량리 맘모스 호텔 옥상에서 반정부 구호를 외치며 투신했다. | |

| 박래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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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1988년) 당시 25세 |
학생열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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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4월 17일 경기도 화성 출생 1982년 숭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입학 1987년 12월 민중후보 선거대책위 선전국장 역임 1988년 3월 민중정당결성 학생추진위 선전국장 역임 1988년 3월 숭실대학교 제20대 인문대학 학생회장 당선 1988년 6월 4일 숭실대학교 학생회관 옥상에서 “광주는 살아있다”, “청년학도여 역사가 부른다. 군사파쇼 타도하자”라고 외친 후 온몸에 신나를 뿌리고 불을 붙인 후 분신 1988년 6월 5일 전신 80% 3도 화상으로 한강성심병원에서 치료 1988년 6월 6일 12시 23분 운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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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년 누이의 가슴팍을 도려내고 죄없는 민중을 난자한 학살원흉이 대통령으로, 국회의원으로 권좌에 앉아, 그 피묻은 손으로 ‘민주’를 떠드는 비극적인 땅! ‘명예회복-보상’ 운운하며 또다시 광주민중항쟁을 능욕하는 학살원흉 노태우와 ‘진상조사는 하되 처벌은 원치 않는다’는 보수야당이 피의 광주를 놓고 벌이는 정치야합과 88올림픽의 휘황찬란한 팡파레 속에 ‘환경미화’란 미명으로 이 땅 민중들의 생존권은 무참히 짓밟히고 있었다. ’88년 당시 숭실대학교 인문대 학생회장으로 활동하던 동지는 광주학살 진상규명과 분단올림픽 반대, 공동올림픽 쟁취, 6·10 남북학생회담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에 앞장섰다. 그러던 ’88년 6월, 민중해방의 신새벽을 앞당기기 위해 싸웠던 동지는 숭실대학교 학생회관 옥상에서 제 한 몸 불살라 학살원흉에게 민주의 불벼락을 내렸던 것이다. “저의 뒤로 저와 같은 죽음이 뒤따라서는 안됩니다”라는 절규로 우리 모두의 투쟁을 촉구하며 ’88년 6월의 불꽃으로 타올랐다. | | |

| 정경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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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1987년) 당시 29세 |
노동열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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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12월 15일 출생 1984년 대우중공업 창원공장 입사 1987년 2월 회사의 임금동결에 항의하는 중식거부투쟁에 참여 1987년 5월 민주노조 건설을 위한 대의원선거 및 노조지부장 선거에 참여 1987년 5월 28일 회사측의 대의원 매수 공작으로 민주노조건설 방해 1987년 6월 8일 외출 후 실종 1988년 3월 2일 창원 불모산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채 발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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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지는 ’84년 대우중공업 창원공장에 입사하여 ’87년 2월경 회사의 임금동결에 항의하는 중식거부에 참여하였고, 같은 해 5월경 노조 대의원, 지부장선거에서 민주파 대의원후보의 당선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민주파 활동가 모임에 참석하는 등 민주노조 건설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였다. ’87년 5월 노조지부장 선거와 관련하여 지지후보가 달랐던 반대파 조합원 이 모씨와의 상해사건에 연루되어 그의 고소로 경찰서 출두요구서를 받기하였다. 그러던 중 같은 해 6월 8일 행방불명되었다. ’88년 3월 2일 창원공장 인근 불모산 기슭에서 유골로 발견되었다. 당시 창원경찰서와 마산지검은 동지가 이모씨와의 폭력사건 합의가 어려워지자 구속을 두려워한 나머지 실종 당일인 ’87년 6월 8일 변사현장에서 목을 매어 비관, 자살한 것으로 수사종결하였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동지의 사건은 실종에서부터 변사사건 내사종결까지 국가기관의 조직적 개입에 의해 조작 은폐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겠다. | | |

| 김태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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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2005년) 당시 세 |
노동열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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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충북 괴산 출생 충주대학교 경영학과 재학 1991년 수안보파크호텔 입사 수안보파크호텔노조 설립 및 노조위원장 1999년 한국노총 충북지역본부 충주지역지부장 당선 2005년 6월 14일 레미콘 노동자 노동자성 인정과 운송단가 인상, 단체협약 체결을 위한 대표자 및 간부결의대회 참석 도중 사측이 고용한 대체 투입차량에 치어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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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정의가 서지 않는다면, 차라리 이 곳에서 모든 것을 묻으리라”는 마지막 글을 남길 만큼 평소 노동자들을 위해 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동지는 2005년 충주지역지부장으로서 지역레미콘 노동자들의 노동3권 보장과 운송단가 인상을 위해 여러차례 사측과 협상을 벌였지만, 교섭은 파행을 거듭했다. 이에 대한 항의로 충주레미콘 노동자와 충주지역지부가 “2005년 6월 14일 “레미콘노동자 노동자성 인정과 운송단가 인상, 단체협약 체결을 위한 결의대회”를 진행하던 중 동지는 충주사조레미콘 회사 앞으로 이동해 특수고용직 노동3권보장 요구와 파업 중 대체근로를 투입시킨것에 대한 항의투쟁을 선봉에서 전개했다. 그러나 사측에 의해 고용된 대체차량은 온몸으로 저항하는 동지를 향해 무자비하게 돌진했고 동지를 무참히 짓밟아 동지는 그 자리에서 운명했다. 동지의 죽음은 800만 비정규직 노동자와 특수고용직 노동자의 비참한 삶을 전 사회에 알려냈고, 대기업 노동자와 영세기업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와 정규직 노동자를 하나로 굳게 단결시키는 투쟁이 불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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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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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1986년) 당시 18세 |
학생열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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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4월 15일 출생 1986년 2월 강릉고 졸업 서울대 사회과학대 입학 연극부에 가입하여 활동 1986년 6월 18일 행방불명 1986년 6월 21일 부산 송도 앞바다에서 시멘트덩이를 매단 채 의문의 죽음. 해녀에 의해 발견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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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지는 ’86년 3월 서울대에 입학한 이후 지리학과 ‘철학인의 모임’에서 활동하였으며, 총연극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사회과학 세미나를 하고 정부비판적인 연극에 참여하였다. 또한 각종 집회·시위 등에 참여하는 등 시위 중 두 차례 연행되었다가 훈방된 일이 있었다. ’86년 6월 18일 자취방으로 걸려온 정체불명의 사람의 전화를 받고 집을 나간 후 행방불명되었고, 그 후 3일이 지난 6월 21일 부산 송도 앞바다 방파제 앞 바다속에서 바위틈에 세 개의 시멘트 덩어리를 달고 눕혀져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이 해녀에 의해 발견되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 당시 매달려 있던 콘크리트 덩어리는 직접 물에 가지고 들어가기는 매우 어려워 사망 또는 의식불명 상태에서 타의에 의해 수장되었을 개연성이 상당하다고 밝혔다. | | |

| 석광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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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1991년) 당시 30세 |
노동열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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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강원도 삼척군 출생 1982년 강국택시에서 3년간 근무 1986년 인천 공성교통에 입사 1991년 6월 14일 지도부 연행에 항의, 차량시위에 적극 참가 1991년 6월 15일 지도부 석방을 요구하며 분신 1991년 6월 24일 10시 28분 운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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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지는 강원도 삼척군 하장면 추동리에서 태어나, ’77년 세일포장에서 13만원의 임금노동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였다. 20살 때 인천에 상경하여 계산동 주차장에 취직하여 어머니를 모시고 자취생활을 시작하였고, ’82년 부평 한시택시인 강국택시에 입사, 3년간 근무하다가 취업을 못하고 있는 친구를 위해 그 자리를 물려주고 강국택시를 퇴사했다. 또 ’86년 3월 공성교통에 입사하여 거의 만근을 할 만큼 성실히 근무생활을 하였고, 계산동 노틀담 수녀원에서 벌이고 있는 장애자 돕기 후원회원으로 없는 살림에 매달 3만원씩 후원회비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91년 3월 노조 대의원으로 피선되어 노동조합집행부를 도와 모든 조합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밤새 북을 치며 노동가를 부르다가 ’91년 6월 15일 6시 20분경 동지는 사업주의 비열하고, 무책임한 임금협상에 온몸으로 항거하며 분신하여, 가족과 동지들의 안타까운 염원을 뒤로하고 같은 해 6월 24일 운명하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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