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의 미스터리 그 의문의 생애
이명박 자서전의 진실은?

들어가는 글
연일 계속되는 촛불집회와 평화시위을 공권력을 동원 진압하는 촛불시국의 현장을 바라보며 이명박 현정권을 곰곰희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니 14개 이상의 범법 사실을 감춘체 대통령 출마한 거짓이 먼져 스쳐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자서전 "신화는없다"와 자서전을 참고로 만든 옜날 드라마 "성공시대"가 떠오르며 혹시나 과장과 거짓으로 기록된 자서전과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는 이명박의 성공신화가 다른 과대포장되고 조작된 사실이 아닐까 하는 의문들이 들더군요.
그리고 이내 그 의문을 가지고 시작한 자료조사에 의해 아주 쉽게 만나게되는 수많은 의문들이 제시되고 또한, 무엇인가 모를 조작의 의혹을 느끼게 하는 자료들이 넘쳐나는 현실을 바라보며 더이상 침묵해서는 않되겠다라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기사을 작성해보았습니다.
앞으로 연제될 게시될 본 기사는 수많은 자료들과 토대로 그의 생애와 그의 거짓 그리고 돌출된 수많은 의혹들에 대해 다시금 제시하고자 합니다.
제1화 복잡한 출생의 의문
출생부터가 의문투성

지난 대선시기 이명박의 출생 및 병역의혹을 제기한 지만원(개인적으로는 똘아이라 보지만 그가 던져준 대통령의 도덕성에 대한 필요성은 아직도 유효하며 높이 사는 바이다.)
이명박은 출생부터가 의문이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단순하게 그의 출생지가 오사카라는 이야기로 말을 하는데 이것은 엄연한 수많은 자료에 비해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자서전에는 “우리(이명박) 아버지 이충우는 1935년(29세 때)에 총각으로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목축일을 했고, 어려운 환경에서 자리를 잡고 돈을 저축해 그 돈을 가지고 고향으로 나와 반야월 채씨와 결혼을 했고, 결혼 후 곧장 일본으로 다시 건거가 6남매를 일본에서 낳았고, 해방 후인 1945년 11월에 돌아와 막내를 한국에서 낳았다”라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과연 진실인가?
의문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이에 대해 군사전문가이자 이명박의 출생과 병역비리을 물고 법정까지 썼던 지만원씨의 말과 자료에 의하면
“그의 자서전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이명박의 형인 이상득 의원이 셋째인데 이상득의 생일이 1935년생”이라며 “이충우가 일본으로 건너갔을 때가 1935년인데 그때는 삼남매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을 때다. 도대체 삼남매는 누가 낳았나? 의혹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이 전 시장이 최근까지도 출생지가 일본임을 감추었으며, 출생지를 수건돌리기 하듯 이리저리 감추었다. 이명박의 공식 홈페이지에 출생지 란이 빠져 있다. 포털사이트마다 이명박의 출생지에 대한 기록이 들쭉날쭉 했다”
“아버지 이충우는 포항에서 북쪽으로 30여리 떨어진 경북포항시 북구 홍해읍 덕성리 농사꾼 집안의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작은 땅 뙈기는 두 형에게 돌아갔으므로 아버지는 젊을 때부터 고향을 떠나 떠돌았다. . . 1935년 고향친구 몇 사람과 함께 살길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간 아버지는 오사카 근교 목장에서 고용됐다”
자서전을 보면 이덕쇠의 두 형이 한국에 남아 있고, 이덕쇠만 오사카로 간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런데 구 호적을 보면 이덕쇠는 맏형과 함께 일본 오사카에서 이웃해 살았습니다. 자서전이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여기서 자서전을 자세하게 보면 1935년에 이명박의 아버지가 총각으로 일본에 건너가 자리 잡고서 돈을 벌어 포항에 나와 어머니와 결혼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6남매를 낳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구 호적을 보면 이덕쇠(이명박의 아버지 이충우로 개명전의 본명)는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미 1930년 1월에 귀선을 낳았고, 만 1년 1개월만인 1931년3월에 채씨와 결혼 결혼하기 13개월 전에 첫 아기를 낳은 것입니다. 그런데 1935년도에 총각으로 기록되어 있는 호적상 모순이 생기고 맙니다.
옜날 사람들이 일부로 호적에 늦게 기록했던건 다반사 이지만 문제는 출생신고했던 년도 보다는 앞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제 호적부상 보면 그대로 자녀들의 출생신고는 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이명박의 이러한 출생의 의문들을 이해하고 설명하기란 참 난감해 질 뿐 이더군요.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구 호적을 보면 모친 채태원씨는 1938년에 포항에 돌아와 귀애를 낳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이명박과 이말분을 낳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1939년 6월 6일에 이명박의 부친은 이름을 이덕쇠에서 이충우로 개명, 9월에는 분가를 한후 채씨가 1938년에 포항에 돌아와 귀애를 낳을 때, 그녀에겐 4살, 7살, 9살배기 아이들이 딸려 있었습니다. 벌어먹기 바빴다는 이덕쇠는 아마도 일본에 남아 있고, 채씨만 포항에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는 가정도 가능합니다만, 이러한 가정을 해도 결과적으로는 6남매를 모두 일본에서 낳았다는 자서전은 거짓이 됩니다.
이덕쇠와 채씨는 1941년에 이명박을 1945년 3월에 이말분을 일본에서 낳은 것으로 호적이 정리돼 있습니다.
이렇게 출생부터 이명박은 의문에 쌓인 존제입니다.
이명박 아버지 이충호 아니 이덕쇠의 호적세탁의 의문
이명박 대통령 부친 이충우씨(1981년 작고)가 일본 오사카에서 생활한 모습을 담은 사진들

일제시대 일본말과 한문으로 기록됐던 이명박의 아버지는 제적등본에는 ‘이덕쇠’로 기록되어 있다
이명박의 아버지 본명이 문제될것은 없다. 물론 이명박 아버지의 본명 이덕쇠란 상민적 이름에 그의 계급 계층적 위치에 상민이라는 것 또한 문제가 없다. 다만 이명박의 자서전에 기록되어 있는 유교적 양반이였다라는 기술은 또다시 거짓이 되는 것 이라는 것만 알기을 바란다.
소화 14년(1939)에 이름을 충우로 개명했고, ‘이유’ 란에는 ‘허가에 의해 이름을 덕쇠에서 충우로 바꾸었다’고 기록돼 있다. 33세에 합법적으로 개명을 한것이다.
문제는 이명박의 아버지에 대한 구 호적과 새 호적이 틀리게 기록돼 있다는 것이다. 호적세탁이라는 의혹을 사기에 충분하다.
그 이유는 이충우의 새 등본은 횡서체로 작성돼 있었고, 아버지, 어머니 등 모든 가족들의 기록들이 ‘서기’연호로만 되어 있다. 이충우의 호적이 1960년대에 새로 제작됐다는 것이다. 1961년 이전에는 ‘단기’ 연호로, 1961년 이후에는 ‘서기’ 연호로 표기돼 있었고, 횡서체가 아니라 종서체로 작성돼 있다. 이것이 왜 문제인가 하는 문제는 당시 60년대에는 ‘가로’(횡)체로 새롭게 작성된 등본이였기 때문이다. 시대상의 공문서 작성을 뛰어넘은 참 이상한 등본이지 않는가?
호적을 다시 기록하려면 옛날 호적상에 나타난 변경사항들을 그대로 다른 사람들은 사진처럼 보여지며 관리되어 있다. 그런데 60년대 방식으로 호적등본이 이전 등본에는 기록되어 있는건 충분한 의문 거리가 된다라고 본다. 가정법원의 호적과와 동사무소에 물어 보았다. 개명은 반드시 기록해야 할 ‘의무사항’ 이라는 역시나 필자가 생각한 범주안의 답변만 받게 되었다.
또다른 의문 이명박과 그의 형 이상득 역시 호적 세탁의 의문






1968년 새 호적등본 이충우씨의 새 호적등본을 보니 이충우, 채태원 등을 비롯하여 모든 가족들의 이름 옆에 주민등록번호를 부여한 고무도장이 찍혀져있다. 그러나, 이상득과 이명박은 고무도장이 찍혀져 있지 않았다.
1968년에 주민등록법에 의거 모든 식구에게 주민등록을 부여하는 고무도장을 찍었을 터인데 이상득과 이명박 형제가 들어 있는 2개 페이지에 들어 있는 4명의 식구들에만 주민등록을 부여하는 그 고무도장이 찍혀져 있지 않은 것은 것은 어떻게 설명할텐가?
공문서 문서 양식에 어긋난 이러한 일련의 기록들 보고 호적세탁이라는 공문서 위조의 결과을 내는 것은 섯부른 판단일까?
내일 이시간에는 제2화 청년기시절의 의문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지만원 총재가 쓴 글 :
이명박이 쓴 자서전(신화는 없다)과 ‘어머니에 실려있는 출생부분의 내용은 모두 8개 인데 모두가 허위다. ’신화는 없다“와 ”어머니“에 실린 출생에 대한 설명은 아래와 같다.
“우리 아버지 이름은 이충우, 3형제 중 막내였다. 할아버지의 땅뙈기는 두 형이 차지했고 아버지 혼자서 친구들과 함께 1935년에 총각으로 일본에 갔다. 자리 잡고 저축하여 한국에 나와 반야월 채씨 여인과 결혼을 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6남매를 낳았다. 아버지는 전통적인 유교풍을 이어받은 양반타입이었다. 남자 돌림자는 ‘상’자, 여자 돌림자는 ‘귀’자인데 나 혼자만 돌림자를 이탈했다. 명박이라 지은 것은 어머니 태몽꿈에 크고 밝은 달이 치마폭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그렇게 지었다.”
이명박이 숨겨놓은 호적을 보면 진실은 아래와 같다.
1. 이명박의 아버지 이름은 원래 떡쇠(德釗)였고, 32세였던 소화 14년에 이름을 충우로 바꾸었다. 이덕쇠는 1907년 생, 어머니는 1909년 생. 서기 1925년이 소화 1년.
2. 할아버지 땅뙈기를 큰 아버지 두 사람이 나누어 갖고 아버지 혼자 일본으로 갔다는 말은 거짓이다. 할아버지의 땅뙈기는 무특-경특-덕쇠 3형제 중 경특이 혼자 차지했고, 무특과 덕쇠는 오사카에 건너가 나란히 이웃하여 대가족을 이루고, 창씨를 스키야마(月山)로 고쳐서 살았다. 이명박의 일본 이름은 '스키야마 아키히로'.
3. 아버지 덕쇠가 1935년에 총각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1935년에는 이미 3남매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1930년에는 귀선이, 1933년에는 상은이, 1935년에는 상득이 태어나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 채씨 여인과는 1931년에 혼인했다. 이명박이 지금에서야 밝히고 있는 덕쇠의 도일 연도는 1927년이다.
4. 3형제 중 아버지 혼자만 일본에 갔고, 큰 아버지 둘은 조선에 남아 있었다는 말도 거짓이다. 2형제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이웃하여 살았다.
5. 어머니의 본이 ‘반야월 채씨’라는 것도 거짓말이다. 그의 모친은 ’인천 채씨‘다.
6. 부친과 모친이 결혼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6남매를 모두 낳았다는 말도 거짓말이다. 4째인 ‘귀애’는 1938년에 포항(영일군 의장읍 덕성동)에서 낳았다. 어머니가 귀국한 것이다. 어머니 채씨는 1938년에 귀국해 있었고, 그 후 이명박과 이말분은 일본에서 태어났다. 이 사실은 이명박과 그 아래 동생 ‘말분’을 일본에서 다른 여인이 낳았을 것이라는 세간의 의혹을 밝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더구나 위 두 개의 책을 보면 이명박과 이말분은 어머니 채씨로부터 혹독한 서자 취급을 받았다.
7. 아버지가 전통적인 유교풍을 이어받은 양반타입이라는 말도 거짓이다. 일본 총독부가 양반-상놈-노비의 계급을 없애면서 양반가에만 유지돼 오던 호적을 하류계급에도 만들어 주었다. 그 이전에는 양반가에만 호적이 있었고, 그 호적에는 노비들의 이름도 있었다. 호적은 즉 양반가의 노비문서이기도 한 것이다. 호적에는 아무렇게나 불리던 노비들의 이름이 이런 식으로 기록돼 있었다. ‘개똥이’는 ‘개동(介童)’이로, ‘이쁜이’는 이분(伊粉)으로, 떡쇠는 덕쇠(德釗)로 . . . 이명박 가문에게는 ‘덕쇠(德釗)’라는 이름이 싫었을 것이다. 아버지인 덕쇠는 32세(1938년)에 이름을 충우로 바꾸었고, 이 개명사실은 옛날 호적에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명박은 1974년 구-호적을 버리고, 새로운 호적으로 바꾸었으며, 새로운 호적에는 이 개명사실이 깨끗이 지워져 있다. 이충우는 태어날 때부터 이충우인 것으로 기록돼 있다. 소위 호적 세탁인 것이다.
이명박은 필자와의 법정 다툼에서 호적이 유실될 우려가 있어 1974년에 재-작성 하였다고 변명하지만 영일군에서 보관하는 호적이 수만 명에 이를 터인데 유독 이명박의 호적만 유실될 우려가 있다는 것도 우습다. 또한 똑같이 영일군에서 보관하는 호적인데 구호적은 유실우려가 있고, 신호적은 유실우려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더욱 더 어이가 없다. 또한 기록을 옮기려면 원래 것대로 옮겨야 한다. 가정법원 호적과에 가서 확인해 보니 개명사항은 필수 기록사항이라 한다.
8. 남자 돌림자는 ‘상’자, 여자 돌림자는 ‘귀’자인데 이명박은 자기 혼자만 돌림자를 이탈했다 변명한다. 이명박은 그의 자서전에서 자기 바로 아래 여동생의 이름을 ‘귀분’이라 기록했지만 호적에는 ‘말분’으로 분명하게 기록돼 있다. 명박이라는 이름은 일본에서 가장 흔한 이름이다. 이명박의 아래 동생의 이름이 ‘말분’이인지를 모르는 기자들은 이명박 한 사람만 돌림자를 이탈한 것으로 알고 왜 이명박 혼자서만 돌림자를 이탈했느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 이명박은 한자의 뜻 그대로 “어머니 태몽꿈에 크고 밝은 달이 치마폭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그렇게 지었다.”고 변명했다. 그렇다면 어머니로부터 이명박과 함께 서자 취급을 받은 말분이는 어째서 돌림자를 이탈하였는지 다시 물어야 할 것이다.
결 론
이명박이 스스로 기록해 놓은 두 개의 책(신화는 없다, 어머니)의 출생부분은 총 8개의 요소로 구성돼 있는데 그 8개의 요소가 모두 거짓말이다. 이는 단순한 연도의 오해가 아니라 너무 황당한 거짓말이며 그 거짓말은 출생부분을 미화하고 이복형제라는 항간의 소문을 감추기 위해 기도한 의도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호적을 세탁한 사실은 가히 충격적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호적을 세탁한 이유에 대한 변명이 유치하기 이를 데 없다는 사실이다.
제자가 웃음을 참으며 아뢰되
"주여, '부킹'이 아니오라 '부팅'이니오이다."하니
1. 너희가 위기(危機)를 아느냐?
이메가께서 연일 '위기'를 거론하시는 지라, 제자들이 나아 와 여쭙되,
"주여, 파탄 난 경제도 일거에 살리 실 주께서 어찌 위기를 염려하시나이까?"
이메가 가라사대,
"너희가 내 말을 오해 하였도다. '위기는 곧 기회'라 하는 말을 너희는 듣지
못 하였느냐.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어찌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모른 단 말이냐. 10년 전 아이엠에프 때를 기억해 보아라.
뭇 사람들이 고통으로 울부짖을 때에도, 1%의 사람들은, 입속으로 '이 대로'를
되뇌며 미소짓고 있었느니라.
보아라! 있는 자는 더욱 넉넉하게 되었으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겼도다
너희는 '강부자'를 넘어 '강금실'로 레벨업하는 방법을 속히 배우라.
'머리가 나쁘면 몸뚱아리가 고생'이라는 말은 너희를 두고 이르는 말이리라.
들을 귀 있는 자만 들을 지어다."
이메가 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들이 더욱 헤깔려 어리둥절해 하니라.
2. 창조적 실용
한 제자가 청아대에 올라 와 이메가께 묻되,
"주여, 어찌하여 컴퓨터가 열흘 간이나 먹통이 되었나이까?"하니
"도무지 '부킹'이 안 되었느니라." 하시는지라
제자가 웃음을 참으며 아뢰되
"주여, '부킹'이 아니오라 '부팅'이니오이다."하니
이메가께서 매우 뻘쭘 해 하시며
"컴맹이 어찌 부팅이라는 말을 쓸 수 있겠느냐.
너무 많이 아는 체 하는 것을 경계하라고 말 하였거늘, 네가 지금 나에게
삽질을 하는 것이냐? 나에게는 '부킹'이라는 말이 더 친숙하니라.
편한 대로 사는 것을 '실용'이라고 하나니 네가 나에게 '주여 주여'한다고
나의 종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중심을 읽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니라."하시매
그 제자가 매우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르더라.
3. 고소영
또 한 제자가 이메가께 아뢰되,
"주여, 백성들이 저희를 가리켜 '고소영 집단'이라고 조롱하더이다."하매
이메가 박장대소하시며 가로되,
"저 들이 미쳤도다. 김흥구기나 이더콰라면 몰라도, 너희들이 어찌 고소영이
될 수 있겠느냐. 그냥 두어라. 새끼쥐(어린 쥐)와 어미쥐(오랜 쥐)도 구별 못
하는 저 들이 아니더냐." 하시니 제자들이 모두 뒤집어 지더라.
4. 이메가 님의 떡 타령
이 때, 한 제자가 급히 나아와 이메가께 아뢰되,
"주여, 이 백성들이 법과 질서를 지키기보다는, 떼를 쓰고 있나이다."
이메가께서 미소 지으며 가라사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마라. 법은 멀리 있으 되 주먹이 가까이 있도다.
내가 새로운 '배꼴단'을 너희에게 주리니, 두들겨 패라 곧 흩어 질 것이요.
잡아 들여라 곧 잠잠해 질 것이니라. 5리를 도망가면 10리까지 쫓아 갈 것이오.
왼쪽 뺨을 때려서 말을 안 들으면 오른 쪽 뺨까지 후려칠 것이니라."
또 다른 제자가 나아 와 묻되,
"주께서는 '정치에 검찰을 이용하지 않겠다.' 하셨사온즉,
그리 하고서야 어찌 주님의 뜻을 제대로 펼칠 수 있겠사오리이까?" 하니
"너희가 또 내 말을 오해 하였도다.
지혜로운 자는 '검찰'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떡찰'을 이용 하느니라.
우리가 왜 그 들을 '떡찰'이라 부르느냐?
'떡값'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하는 자 들이요.
수사 실력은 '개떡' 이로되, 권력에 빌붙은 데는 '찰떡' 아니냐.
그렇다고 그 들을 '비지떡'으로 보느냐? 결코 아니니라.
절체절명의 위기도 잠시의 '쑥떡쑥떡' 으로 '우물떡 주물떡' 넘기는
놀라운 기술을 너희가 똑똑히 보지 않았느냐. 무릇, 가진 자는 '꿀떡'
이로되 못 가진 자는 항상 '피떡' 이 되는 것이 이 바닥의 규칙이니라.
빼앗긴 자들은 밖에 나가 슬피 울며 이를 갊 만이 있으리라.
그러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는 저 들도 '떡'으로 살 것이 아니오. 오직 내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야 할 것이니라."
이메가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니 온 무리가 심히 떨며 두려워 하니라.
5.기적을 이루시다
그 때에 각하께서 취임식을 마치시고 청와대에 입성하시니 많은 무리들이
그를 따르며 노래를 부르고 깃발을 흔들며 기뻐하였다. 나팔 소리, 북소리,
환호소리 가운데 각하께서 청와대에 들어서시자 앞 뒤에 따르는 사람들이 모두 환성을 올렸다.
“호산나, 오사카의 자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 지극히 높은 자리에 오르셨도다, 호산나!”
각하께서 국무회의가 열리는 큰 방에 들어서시어 회의 탁자와 집기들을
둘러 보시며 말씀하시었다. “이렇게 서로 멀리 떨어져 앉아 무슨 회의를 한단 말이냐?
서로 소근거리며 할 말도 앞으로는 많을 것이다.” 이렇게 가르침을 주시며 두 손을 치켜들고,
“좁아져라!” 하시니 테이블 사이즈가 작아지고 의자 간의 간격이 좁아졌다. 이어서 각하께서,
“의자 팔걸이를 없애고 바퀴를 달아라,” 하시니 그대로 이루어졌다.
순식간에 이루어진 기적을 보며 무리들은 수근거리며 두려워 하였다. “저 사람이 누구냐?
포항과 오사카를 드나들던 덕쇠(德釗)의 아들 명박이가 아니냐.
어디서 저런 권능을 받았을까. 아마도 큰 마법을 익히신듯 하다.”
이미 과거에 말씀 한마디로 전봇대 두 개를 사라지게한 기적을
본 무리들은 경외의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그를 우러러 보았다.
6.실용의 정치를 보여주시다
제자들과 한 무리의 사람들이 기다리는 회의실에 각하가 들어서시자
사위는 물을 끼얹은듯 조용해졌다. 또 어떤 권능과 기적을 보여주실까 하
는 기대와 더불어 두려움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리에 좌정하시며 각하께서
입을 여시었다.
“너희 중에 라면 한 개 값이 얼마인지 아는 자가 있느냐?”
너무나 어려운 질문에 제자들과 무리들이 답을 못하자 각하께서는
이렇게 다시 물으셨다.
“너희 중에 집에서 라면 끓여먹는 자가 있느냐?” 그러나 무리 중에 선뜻 답하는 자가 없자
각하께서는 미소를 지으시며 이렇게 말씀 하시었다.
“잘 들어두어라. 우리야 라면을 안먹으니 그 값의 오르내림에 관심을
안두었고 그러니 라면 값 모르는 것이 크게 탓하고 흉 볼 일은 아니니라.
그러나 서민들은 100원이 올랐다고 지금 아우성을 치고 있다. 도대체
왜 라면 값이 올랐겠느냐?”
그때에 한 용기있는 제자가 앞으로 나서며 답하였다.
“유가가 폭등하며 전 세계 곡물 가격이 상승하여…..”
제자의 대답이 채 끝내기도 전에 각하께서는 다시 한 번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시었다.
“너희 중에 톤(t) 당 밀가루 값이 얼마인지 아는 자가 있느냐?”
제자들이 진땀을 흘리며 서로 눈치를 살피고 있으니 각하께서 말씀을 하시었다.
“잘 들어 두어라. 나는 밀가루의 톤(t)당 가격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말하지 않겠다.
나를 가리켜 너무 많이 아는체 한다고 할까 두렵도다.”
회의를 마치시고 각하께서 자리를 뜨시자 제자들은 당혹감에
사로잡혀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각하의 질문에 단 한 개의
정답도 못내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한 제자가 큰소리로 외쳤다. “아하! 이것이로구나! 이것이
각하가 말씀하시는 실용이구나. 현장으로 뛰어다니며 라면 값과 밀가루 값을
알아내라는 실용의 정치를 가르치신 것이구나!”
그 말을 듣자 다른 제자들도 그 말이 옳다하며 모두 감격해마지 않았다.
어떤이는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고 큰 소리로 아멘을 외치는 자도 있었으며
고래고래 할렐루야를 외치는 자도 있었다. 순식간에 회의장은 환호와 광란의 도가니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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