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시사,유머

9월의 모란공원 열사

또리아빠 2010. 9. 4. 09:10

안동근  
  (1961년~2001년)   당시 41세 노동열사
 
1961년 5월 18일 경북 대구 출생
1994년 인천 삼표레미콘(구 경기레미콘) 근무
1994년 2월 전국콘크리트믹서트럭협의회 결성 사무총장
이후 7여년간 전국을 순회하며 레미콘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투 쟁과 조직사업진행. 부실공사추방운동, 불량레미콘추방운동, 건설 환경개선운동 등 레미콘관련 투쟁의 산 증인
2000년 9월 22일 전국건설운동노동조합 설립주도. 전국건설운송노동조합 사무처장
2000년 10월 인천지역 레미콘노동조합 노조인정 및 운송단기 인상투쟁 주도
2001년 3월 부천 유진레미콘 투쟁 현장에서 회사가 사주한 용역 깡패에게
무차별 폭행을 당하고 인하대학병원에 입원
2001년 4월 완치되지 않은 몸으로 전국건설운송노동조합 총파업 출정식에 참석
2001년 5월 폭행으로 인한 후유증으로(유진레미콘 사건) 병원에 재입원
2001년 6월 증상 악화로 서울대학 병원으로 이송 입원
2001년 9월 5일 운명
 
동지는 ’94년 전국콘크리트믹서트럭협회를 결성하고 사무총장을 역임하면서 7여년간 전국을 순회하며 레미콘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쉼 없는 투쟁과 조직사업을 벌였다.
동지는 건설기계(믹서트럭, 덤프트럭)에서 자동차로의 이관 저지투쟁, 완전개별(실명)로 개별보험 가입 허용, 레미콘 운반단가(사용료) 산출 등 셀 수 없이 많은 투쟁들을 벌여 레미콘노동자들의 권익을 향상시켰다.
’00년 9월, 전국건설운송노동조합의 설립을 주도한 동지는 인천지부 사무국장을 역임하고 10월부터는 인천지역 레미콘노동자들의 노조인정을 위해 투쟁하였으며 ’01년 4월부터 전국레미콘노동자 상경투쟁을 주도하였다.
그러던 중 부천 유진레미콘 투쟁현장에서 회사가 사주한 용역 깡패에게 무차별 폭행을 당하고 이로 인하여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 후 완치되지 않은 몸으로 서울역 광장에서 있었던 전국건설운송노동조합 총파업 출정식에 사회자로 참석하기도 했던 동지는 증상악화로 서울대학병원에서 입원 치료 중 41세의 젊은 나이로 운명하였다.

 

 

임혜란  
  (1965년~1993년)   당시 28세 노동열사
 
1965년 4월 17일 서울 출생
1984년 숭의여고 졸업
고려대 가정교육학과 입학, 고대 기독학생회 동아리 활동
1988년 운동 위해 중퇴, 인천 링크시스템 입사
1989년 대한 트랜스(주) 입사, 노동조합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
1990년 노동쟁의와 관련하여 해고당함 업무방해 혐의로 6개월간 옥고
1991년 인천지역 노동자들을 위한 문화공간 제공 및 기독교 복음 전파를 목적으로 설립된 인천노동 선교문화원 창립. 선교문화원 ‘땀방울산악회’ 간사로 활동
1992년 9월 17일 백혈병으로 입원, 투병활동
1993년 9월 9일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운명
 
동지는 서울출생으로 숭의여고를 졸업하고 고려대 가정교육학과에 입학하여 고대기독학생회 동아리 활동을 시작하면서 이 땅의 사회적 모순에 대하여 인식하게 되었고,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 ’88년 대학교를 중퇴한 이후 인천 링크시스템에 입사하였다.
그리고 ’89년에는 보다 적극적인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 구로1공단에 소재하고 있는 대한트랜스(주)에 입사하여 노동조합 결성을 주도하였고, 이러한 과정에서 노동쟁의와 관련하여 부당해고와 업무방해를 하였다는 혐의로 6개월 간의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다.
출소 이후 동지는 인천지역 노동자들을 위한 문화공간 제공 및 기독교 복음 전파를 목적으로 설립된 ‘인천노동선교문화원’ 창립에 참여하였고, 문화원 ‘땀방울산악회’ 간사로 활동하던 중 백혈병으로 ’92년 9월경부터 투병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1년여의 투병에도 불구하고 동지는 ’93년 9월 9일 꽃다운 나이에 신촌세브란병원에서 운명하고 말았다.

 

 

 

김영자  
  (1944년~1993년)   당시 50세 사회운동
 
1944년 3월 2일 충남 출생
1963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농가정학과 입학
1966년 대학 졸업후 정읍농림고등학교 교사로 3년간 재직
1969년 3월 상계동에서 비닐하우스 시설원예 농사 시작
1975년 지역탁아소인 ‘원터 어린이집’ 운영
1977년~1978년 ‘가톨릭농촌여성회’ 초대회장
1986년 성남민주화운동연합 여성분과 위원장으로 활동
1989년 경기도 여성농민위원회 총무
1990년 ‘큰우리 소비자협동조합’ 이사장으로 활동
1993년 3월 위암진단을 받고 투병
1993년 9월 11일 오전 9시 30분 운명
 
동지는 ’66년 서울대 농대 농가정학과를 졸업한 뒤 정읍농고에서 후학양성에 힘을 쓰다가 ’69년 대학시절부터 고민해온 고된 농사일과 봉건적 억압에서 고통받고 있는 여성농민의 권익향상을 몸소 실천하기 위하여 상계동에서 비닐하우스 시설원예 농사를 시작하였다.
이로부터 동지는 농업을 살리고 예비농업인의 실습터이자 농업기술지도소, 나아가 예비농민들의 어머니로서 헌신적인 뒷바라지를 시작하였다. ’75년 지역에서 지역탁아소와 어머니 자치활동으로 작은 공동체의 모범을 만들었고, ’77년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가톨릭농촌여성회’ 설립에 산파역할을 했으며 초대회장을 역임하였다.
가농여회는 ’85년 가톨릭여성농민회로 성장하였고 동지는 다시 회장을 맡아 열성적인 활동을 하였다. 이후 동지는 성남에서 지역운동을 지도하여 각종 연합단체의 공동대표로, ’80년 민주화운동을 지도하였다. 이후 전국여성농민회 경기도 총무를 역임하였다. 노태우군사정권에서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남편이자 동지인 김준기 선생의 뒷바라지와 자녀교육 등으로 많은 어려움속에서도 ’90년 성남 ‘큰우리 소비자협동조합’ 이사장으로 농촌운동과 생협운동에 헌신하였다. 그러나 ’93년 동지는 갑작스런 위암진단을 받고 투병하다가 ’93년 9월 11일 운명하였다.

 

김종하  
  (1961년~1989년)   당시 28세 노동열사
 
1961년 8월 출생
1978년 동계중학교 졸업
1979년 서울 성동구 시티즌 시계 입사
1985년 인천 경동산업 입사
1989년 4월 임금인상 대책위원으로 활동
1989년 5월 ‘디딤돌’ 친목회에서 적극적 활동
1989년 8월 31일~9월 4일 ‘디딤돌’ 친목회 임원에 대한 부당한 징계에 항의하여 농성투쟁
1989년 9월 4일 노무이사와의 담판이 결렬되자, 노무이사에게 신나를 끼얹고
함께 분신한 뒤 불붙은 몸으로 조합원들에게
“경동의 동료들은 싸워 이깁니다, 노동자는 승리합니다”라고 절규
1989년 9월 15일 한강 성심병원에서 운명
 
동지는 ’85년경에 인천 서구 경동산업에 입사하여 일하면서 ‘디딤돌’이라는 노동자 친목 모임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국면에서 8월 17일부터 30일까지 2주간에 걸쳐 사측의 노동법을 무시한 해고와 부서 이동, 일방적인 단체협약 체계 관행에 항의하여 완강한 파업투쟁을 전개하였으나 사측은 경찰을 동원하여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8명을 구속하고 500여명을 일방적으로 해고하였다. 해고자들은 ’89년 8월 31일부터 부당한 징계철회를 요구하며 농성을 하였다. 사측은 농성자들의 대화요구를 거부하고 매일같이 구사대 200여명을 동원하여 폭력을 자행하고 해고자들의 가족까지 짓밟았다. 해고자 3명이 부평에서 연행당한 상황에서 9월 4일 3시경 사측은 경찰과 200여명의 구사대를 동원 강제 해산시키고자 하였다. 강현중 동지가 나와 같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은 오른편에 싸우다 감옥에 갈 사람은 왼편에 서라며 죽음을 각오한 투쟁을 결의하자 동지는 태극기를 목에 두르고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절을 하고 어머니의 노래, 애국가를 다함께 불렀다.
동지와 김종하 동지 등 3명은 함께 본관3층 징계사건의 주모자인 이사실에 들어가 마지막 담판을 하려하였다. 하지만, 징계를 받지 않으면 구속시켜버리겠다는 뻔뻔스런 대답에 동지는 이사를 잡고 불을 켜 분신 항거하였다. 한강성심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던 동지는 9월 15일 오전 9시 반경 운명하였다.

이형관  
  (1972년~1997년)   당시 25세 학생열사
 
1973년 경기도 성남 출생
1992년 인천 제물포고 졸업, 군산대 수학과 입학
1994년 군산대신문 편집장
14대 전국대학신문기자연합(전대기련) 전북지부장
1995년~1996년 전대기련 전북지부 집행부, 하이텔 전대기련 동우회 시삽
1996년~1997년 전대기련 중앙집행위원
1997년 9월 21일 대학언론 탄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원광대로 가던 도중 쓰러져 19일간 혼수상태였다가 뇌출혈로 운명
 
군산대 신문사에서 대학언론운동을 펼치던 동지는 크게 화내는 일이 없고 쉽게 흥분하지 않는 고요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동지였다. 동지는 ’94년 체계조차 잡혀있지 않는 전대기련 전북지부 지부장을 맡아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전북지구를 일궈 나갔다. 나아가 96년부터는 전대기련 중앙집행위 활동을 하면서 대학언론의 올바른 방향을 잡고, 학교 측에서 자행하는 대학언론탄압을 막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던 중 동지는 ’97년 9월 1일 밤 11시부터 새벽 5시까지 한양대에서 기자들과 간담회를 마치고, 9월 2일 오후 1시부터 새벽 5시까지 외대에서 중앙위원회 회의를 준비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대학언론탄압문제로 힘들어하고 있는 원광대 후배들을 만나기 위해 피곤한 몸을 이끌고 긴급히 내려가게 되었다. 당시 동지에게 출발 직전 손이 떨리고 말이 더듬거리는 뇌졸중 초기 증세가 나타났으나 피곤해서 그럴 것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강남터미널로 출발했다. 그러나 동지는 새벽 7시 강남터미널 경부선 승차장 쪽 보도블럭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렇게 쓰러진 지 19일간 의식불명 상태였던 동지는 9월 21일 새벽 1시 20분경에 운명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