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시사,유머

11월의 열사

또리아빠 2010. 10. 30. 09:14

권재혁  
  (1924년~1969년)   당시 45세 사회운동
 
1925년 함양 산청 출생
1950년 서울대 문리과 사회학과 졸업
1952년 10월 경신중학교 교사
1952년~1954년 부산세관 근무
1956년 6월 도미유학 몬타나주리대학 경제학과
1957년 8월 미국 몬타나주립대학 경제학과 박사학위 과정 이수
1957년 10월 오리곤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 전학 계속 박사과정 이수
1960년 4월 혁명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 육사 경제학과 교수
1962년 9월 건국대학교 정경대학 경제학과 강사 및 경제문제연구소 상임위원
1963년 6.3사태후 ‘민주사회동지회’(혁신계의 결집체)에서 이일재 선생 만나 노동자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동지를 규합
1963년 7월 건국대학교 정경대학 경제학과 강사 및 경제문제연구소 상임위원 사임
1963년 8월 한국 수산개발공사 영업책임자로 한국 귀국
1965년 한일협정 반대운동 지도와 수배자를 자택에 숨겨줌
1968년 1월 ‘남조선해방전략당’문건 작성
1968년 말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남조선해방전략당’의 당수로 지목
1969년 11월 4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집행
 
동지는 ’25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났다. 해방직전 중학생 신분으로 사회주의계 독립운동 모임 장소 문지기를 하면서 민족의식을 키웠다. ’50년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56년 미국 유학을 떠나 ’57년 10월 오리곤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에 전학하여 계속 박사과정을 밟았다. ’60년 4월 혁명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 육사 경제학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63년 6.3사태후 ‘민주사회동지회’에서 이일재 선생 만나 노동자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동지를 규합하기 시작하였다.
동지는 노동자와 청년학생들을 살리기 위해 우리 민족의 운명이 남의 손안에 있고 남의 군사적 보호밑에서 유지되고 있는 것을 민족적 치욕의 극치라고 생각하고 남한 독자적인 노동자 중심의 정당을 건설하여 독재정권과 맞서야 된다는 생각에 동의하는 동지들과 조직을 만들어 갔다. 또한 ’68년 1월 ‘남조선해방전략당’ 문건을 작성하고 동학의 조직운영 형태인 접과 포의 형식으로 조직을 운영하였다. 중앙정보부 ‘통혁당’조사시에 동지가 준비 중인 조직이 중앙정보부에 알려져 소위 ‘남조선해방전략당’사건으로 조작이 되었다. 동지는 ‘남조선해방전략당’ 당수로 지목되어 ’69년 11월 4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집행을 당했다.

 

 

최응현

 
  (1969년~1990년)   당시 22세 학생열사
 
1969년 8월 29일 경북 울진군 출생
1984년 세종고 졸업
1987년 한양대 섬유공학과 입학
1988년 6월 전방입소 반대특위 부위원장 활동 중 구속
1989년 복학
1990년 11월 8일 한양대 옥상에서 투신하여 운명
 
동지는 ’69년 경북 울진에서 출생하였다. 동지는 한양대에 입학한 이후 학생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였다. ’88년에는 전방입소 반대 특위 부위원장으로 활동 중에 6월 구속되어 11월에 집행유예로 출소하였다. ’89년 복학을 하였으나, 가정형편상 다시 휴학과 복학을 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변혁운동에 대한 의지를 꺾지 않고 있다가, ’90년 11월 8일 한양대 교내 건물 옥상에서 민주화투쟁에 제대로 복무하지 못함을 자책하는 유서를 남기고 투신하여 운명하였다.

 

 

전태일  
  (1948년~1970년)   당시 22세 노동열사
 
1948년 8월 26일 경북 대구시 남산동 출생
1963년 대구 청옥 고등공민학교 입학 후 가정 사정으로 그만둠
1965년가을 평화시장 내 삼일사에 견습공으로 취직한 이후 한미사 재단보조, 재단사로 일함
1969년 6월 평화시장 내 재단사 모임인 ‘바보회’ 조직함
1970년 4월~8월 서울 삼각산의 ‘임마뉴엘 수도원’ 건물 신축 공사장에서 4개월 가량 잡역부로 일하며, 이 시기에 평화시장의 형제자매들 곁으로 돌아가고자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림
1970년 9월 바보회를 투쟁단체인 ‘삼동친목회’로 새롭게 조직하고 회장에 선출됨
1970년 10월 8일 삼동회 대표들이 (주)평화시장 사무실에 찾아가 다락방 철폐, 노조결성지원 등 8개항의 요구를 제출함
1970년 10월 24일 근로조건 개선 시위를 기도했으나 실패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 30분경 평화시장 앞길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거행하면서 분신, 밤 10시경 성모병원 영안실에서 불꽃같은 짧은 삶을 접음
 
동지는 ’48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동지는 16살 때부터 평화시장 봉제공장의 시다로 노동자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봉제공장의 열두어 살 소녀들이 하루 열네 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손발이 마비되도록 일해도 생계마저 위협받는 청계천 여성노동자들의 비참한 모습을 본 동지는 착취와 혹사에 대한 분노를 갖게 되었고 나아가 이를 없애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하게 되었다. ’69년 6월부터 재단사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바보회’ 모임을 조직하고 밤이 새도록 ‘근로기준법’ 조문을 뒤지며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은 노동운동을 시작하였다. 많은 고민을 거듭하다가 ‘바보회’를 ‘삼동친목회’로 바꾸고 청원과 진정 대신 더 적극적인 투쟁방법을 계획했다. 직접 청계천 노동자들에게 설문조사를 하고 이를 토대로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조건개선 진정서’를 만들어 삼동회원과 노동자 90여 명의 서명을 받아 다시 노동청에 제출하였고, 이것이 경향신문에 크게 보도되기도 했다. 하지만 실질적인 근로조건 개선 없이 업주들의 횡포와 노동부 등 정부당국의 멸시가 이어지자 동지는 삼동친목회를 소집하여 ’70년 10월 20일과 24일 시위를 계획하지만 실패한다. 마침내 동지는 11월 13일 청계천 노동자들 앞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의 의미를 담아 오후 1시 30분경 시장 골목에서 몸에 석유를 붓고 불을 당겼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외치며 산화하였다.

 

권중희  
  (~2007년)   당시 세 사회운동
 
1936년 경북 안동 출생
1982년 백범 암살범 안두희가 잡지를 통해서 자신의 역적행위를 부인한 것에 격분하여 추적시작
1987년 대로상에서 '정의봉'으로 1차응징
1987년 구속수감후 6개월 집행유예로 출소
1991년~1992년 여러차례 백범 암살 진상규명 촉구
1993년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자서전 집필
1996년 박기서 선생이 안두희 처단
2004년 1월 31일 미국정보당국의 백범 암살배후 근거를 찾기 위해 출국
2004년 2월 1일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조사 시작
2004년 3월 17일 주요내용 파기로 큰 성과없이 귀국
2004년 7월 민족정기구현회 설립, 누리집 중심 활동
2004년~2007년 주한미군철수운동본부 고문, 6.15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고문 등 통일운동 일선에서 활동
2007년 11월 16일 자택에서 집필 중 급서
2007년 11월 16~20일 민족통일애국지사 故 한길 권중희 선생 사회장

 

제종철  
  (1968년~2003년)   당시 35세 사회운동
 
1968년 11월 20일 경남 진주 출생
1987년 한국외국어대학교(용인) 폴란드어과 입학
1989년 총학생회 기획부장
1993년 경기인천지역대학 총학생회 연합 연대사업위원장
1994년 한국대학 총학생회 연합 연대사업위원장
2001년 저소득 실직가정 어린이를 위한 방과후무료교실 느티나무 운영위원
2002년 미군장갑차 여중생 고 신효순 심미선 살인사건
범국민대책위원회 상황 부실장, 경기북부 여중생범대위 사무처장
의정부청년회 준비위원장, 의정부청년문화학교 인터넷교실 반장
2003년 건설노동자 및 저소득층 자녀 탁아방 교사
민주노총 금속노조 경기북부지역지회 교섭위원(미조직위원)
경기북부지역 일반노조(11월 18일 설립) 부위원장
2003년 11월 20일 운명
 
대학시절부터 이 땅의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해 청춘을 불사르던 동지는 대학 졸업 후에도 경기북부지역에서 청년단체를 만들고 일꾼들과 함께 노동단체를 만들었다. 그리고 노동단체를 통한 열성 일꾼을 만들어 내고 지역을 확대했다.’02년 온 나라가 ‘월드컵 4강’ 열기에 취해 미군장갑차에 의해 희생된 미선이와 효순이의 죽음에 침묵할 때, ‘의정부 청년회’ 창립멤버로 활동하던 동지는 미선이와 효순이의 언니들이 다니던 의정부여고 학생들과 함께 눈물의 촛불집회를 조직해 미국을 반대하고, 미선이 효순이의 죽음에 분노하며, 미국에 강하게 항의하는 시민들의 뜨거운 함성을 모으는 큰 역할을 했다. 이것은 여중생의 부모님을 설득해 투쟁의 공간에 나서게 하는 등 동지의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였다.
이렇듯 짧은 생애를 뜨거운 열정으로 불태우던 동지가 차가운 주검으로 발견된 것은 ’03년 11월 20일 경기도 의정부시 가능동 미 2사단 캠프 레드클라우드 앞에서 미군 무죄평결 1주년 기념 촛불집회에 참여한 뒤 집으로 돌아오던 의정부역 철길 위에서였다.
경찰은 동지가 철길에 누워 있다 달려오던 열차에 치였다며 자살 또는 사고사로 결론 냈지만, 당시 동지가 많이 취하지 않았고, 열차 하체 바닥이 인체에 닿으면 형체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시신이 훼손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고 사고가 나기 30분 전쯤에 부인과 일상적인 통화를 한 점으로 미루어 동지의 죽음에 의문점이 남아 있다.

 

천덕명  
  (1963년~2002년)   당시 39세 노동열사
 
1964년 경남 고성 출생
1984년 20살에 인천으로 상경, 합판공장에서 성실하게 근무
1993년 경인운수(전 영화교통) 입사
1994년 경인운수 노동조합 대의원으로 활동
1996년 경인운수 노동조합 회계감사
2002년 월급제 쟁취를 위한 인천민주택시 총파업에 열성적 참여
2002년 경인운수 노동조합분회 대의원
2002년 11월 22일 사측의 무자비한 월급제 탄압에 맞서 월급제 사수와 인간다운 삶을 위해 분신하여 운명
 
동지는 경남 고성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농사일을 돕다가 스무 살에 인천으로 상경하여 합판공장에서 공장생활을 시작하였다.
’93년 경인운수의 전신인 영화교통에 입사한 동지는 입사 초부터 노동조합의 대의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여 회계감사를 역임하며 노조간부로서 활동하는 가운데 누구보다 노동자의 권익확보를 위해 열성적으로 투쟁하였다.
특히 택시노동자들의 염원인 완전월급제 쟁취를 위한 민주택시연맹 인천본부의 65일간의 총파업에 빠짐없이 참석했으며 긴 파업기간동안 동지들이 흐트러지는 것을 막아내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다. 사측은 부당한 불성실근무 제재와 임의적인 성과급 감산, 개인택시 경력을 축소 조작하는가 하면 급기야 징계위원회에 회부하고 동지에게 참석을 통보하였다. 평소 남에게 상처주는 말을 하지 않았던 동지는 “이렇게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회사가 해도 너무한다”, “회사를 가만히 두고만 봐서는 안된다”며 분개하였다.
결국 동지는 개인택시 수령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상태에서 회사 측의 부당한 노동탄압에 맞서기 위해 새벽 0시 30분 경 회사 내의 차고지에서 자신의 차량에 신나를 끼얹고 분신하여 운명하였다.

 

 

이덕인  
  (1967년~1995년)   당시 29세 사회운동
 
1967년 12월 전남 신안군 출생
1995년 6월 아암도에서 노점 시작
1995년 11월 25일 노점 철거에 반대 망루 농성 중 지부연대 위해 이동
1995년 11월 28일 오전 10시 철거 감시용 망루에서 농성중에 있던 이석근씨에 의해
의문의 죽음을 당한 채로 인천 앞 바다에서 발견
 
동지는 ’95년 7월 인천시가 아암도에 군사보호시설 지구 철조망을 제거하자 이 지역에서 전국노점상연합회 동지들과 함께 장애인의 자립기반 마련을 목적으로 노점을 시작하였다. 인천시와 연수구는 아암도에 친수공간을 조성한다는 이유를 들어 용역회사를 고용, 경찰의 비호아래 1,500여명을 투입 생존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던 수십명의 노점상들을 11월 24일 오전 7시 한겨울 추위에 내모는 철거를 집행하였다. 노점상들은 철거를 막아낼 수 없다고 보고 10월경에 건설해 둔 망루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전개하였다.11월 25일 저녁 동지는 고립 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외부에 소식을 알리고자 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외부로 탈출을 결심한다. 동지는 동료와 함께 저녁 8시 45분경 탈출을 시도 먼저 망루를 내려오다, 동료는 경찰이 자신들을 발견하고 망루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듯하여 동지에게 먼저 가라고 손짓한 후 다시 망루위로 올라갔다. 이것이 동지의 마지막 생전모습이었다. 망루를 떠난 지 3일 뒤 11월 28일 오전 10시경 동지는 농성장 근처의 아암도 앞바다에서 극도의 허기 그리고 추위와 싸우면서 근근이 버티던 동료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 동지의 죽음은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에 의해 죽음을 당한 것으로 결론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