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시사,유머

12월 열사

또리아빠 2010. 12. 3. 12:53

 

김병곤
 
  (1952년~1990년)   당시 37세 사회운동
 
1953년 경남 김해 출생
1971년 2월 부산고등학교 졸업
1971년 3월 서울대학교 상대 입학
1973년 유신반대 시위로 첫 구속
1974년 민청학련사건으로 사형선고
1984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가입
1985년 민민투 사건으로 구속
1987년 구로구청 사건으로 구속(투쟁지도부 상황실장)
1990년 12월 6월 위궤양 및 위암3기로 오랜 투병 생활 끝에 운명
 
’74년 4월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사건으로 군사법정에서 이철, 유인태, 김지하 등과 함께 21세의 가장 어린나이로 구속되어 사형이 구형됐으나 동지는 최후진술 첫마디에서 사형이 구형된 것에 대해 “영광입니다”라고 외침으로써 많은 감동을 줬다. ’87년 12월 구로구청사건으로 구속되어 교도소 생활을 하던 중 건강에 이상을 느껴 교도소와의 싸움 끝에 외래진료를 받았으나 진행성 위암3기로 판명돼 ’88, ’89년 두 차례의 수술을 받았으나 ’90년 12월 6일 오랜 투병생활 끝에 그토록 바라던 민주세상을 보지 못한 채 운명했다.

 

 

한희철  
  (1961년~1983년)   당시 22세 학생열사
 
1961년 2월 11일 경남 마산 출생
1979년 2월 철도고 졸업
3월 서울공대 기계설계학과 입학(철도청 장학생)
서울대 가톨릭학생회 활동
1982년 12월 1일 군에 입대
1983년 12월 11일 녹화사업을 받던 중 의문의 죽음을 당함
 
동지는 ’79년 서울대학교에 입학 후 동아리인 가톨릭학생회 활동을 시작해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을 갖고, 민주화와 민중운동을 시작했다. 당시 주민등록증 일제 갱신 시기여서 수배중인 운동권 학생들이 도피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를 도와주려다 이 사실이 보안사에 발각되어 휴가복귀 후 부대근무 중 ’83년 12월 6일 보안사령부로 연행 이 사건으로 군부대 녹화사업을 받게 되었다. 입대 전 학생시절의 민주화운동과 야학연합회 사건 관련 혐의로 전기고문을 당하면서 5일 동안 취조를 받고난 후 12월 10일에 석방돼 부대에 복귀했고 그 다음날인 12월 11일 새벽 4시 30분경 동지는 부대 내 문서 보관창구 앞 보초서는 자리에서 가슴에 3발의 총탄을 맞고 사망한 채로 발견됐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보안사의 불법적인 연행, 조사 및 폭행 가혹행위와 죽음이 인과관계가 있어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로 인한 사망으로 인정했다.

 

 

이재식  
  (1952년~1989년)   당시 37세 사회운동
 
1952년 5월 20일 충북 충주에서 소작을 짓던 이도희씨의 장남으로 태어남
1979년 국민학교 졸업 후 머슴살이, 생선장수, 이발사, 우체국 집배원생활
1985년 거제도로 옮겨와 대우의 하청 회사인 성흥사, 한국의장 등에서 일하며 노동조합활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듬
1988년 7월 한겨레신문 창간이후 거제지부 총무로 일함
1989년 7월 아내와 노점상 시작
10월 16일 12시 50분 현 정권의 무자비하고 대책 없는 노점상 철거에 항의하 며 분신
12월 11일 운명
 
동지는 중학교 중퇴 후 머슴살이, 생선장사, 이발사, 집배원 등을 하며 15년간을 고된노동을 하며 살았다. 결혼한 이후 거제도로 이주하여 대우중공업의 납품업체인 ‘성홍사’에서 노동자로 취업해 노동과 생산의 기쁨이 수탈과 착취로 얼룩지는 현실에 분노를 느끼며 ‘노동조합 추진위원회’를 구성해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89년 6월부터 부인과 함께 힘을 합쳐 호떡을 팔아 가난한 살림에 보태고자 거제군 신협읍 읍사무소 앞에서 노점을 시작했다. 그러나 읍사무소는 대책도 없이 단속과 철거를 자행했다. 몇 십 만원이나 밑천을 들어 몇 푼 벌지도 못한 상태였다. ’89년 10월 16일 노점단속반이 거제군 농촌지도소 앞에서 손수레를 끌고 갔다. 동지가 통사정을 해도 듣지 않고, 읍장은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하자 동지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그만 휘발유를 몸에 끼얹고 불을 당겼다.

 

 

조영래  
  (1947년~1990년)   당시 43세 사회운동
 
1947년 3월 26일 대구 출생
1965년 3월 서울대 법대 입학
1969년 3월 서울대 대학원 입학
1971년 10월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
1983년 변호사 개업, 전태일 평전 집필
19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 등 변론
1990년 9월 폐암 3기로 입원
1990년 12월 12일 여의도 성모병원에서 운명
 
동지는 서울대 재학 중 한일회담 반대, 삼성재벌 밀수 규탄, 6·7부정선거 규탄, 삼선개헌 반대, 교련반대, 공명선거쟁취 등의 학생운동을 주도했으며,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된 후 6년 가까이 피신생활을 하던 중 민주화운동에 주력했다. 특히 3년여에 걸친 각고 끝에 전태일 평전 ‘어느 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집필하는가 하면,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망원동 수재사건, 대우어패럴사건, 이경숙 사건 등을 변론하였고, 변호사협의회 인권보고서를 집필하기도 하였다. 또한 보도지침사건, 박길재 사건을 담당했으며, 노동, 빈민, 공해, 학생운동 관련사건 등 인권변호에 전력하던 동지는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을 만들고 활동하는 과정에서 지병인 폐암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염원을 뒤로 한 채 운명했다.

 

 

 

장현구

 

 

  (1968년~1995년)   당시 26세 학생열사
 
1969년 서울 출생
1989년 경원대학교 공과대학 전기공학과 입학
1990년 카톨릭 학생회 회장, 제1대 공대 학생회 홍보부장
1991년 제2대 공대 학생회 제 1기 학원 자주화 추진위원장
1992년 11월 제9대 총학생회 제 1기 학원자주화 추진 위원장
대통령 공정선거감시단 활동 중 폭력 연행후 고문수사 당함
1993년 2월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으로 출소
1993년 3월 부정입시관련 비상학생총회 중 교수, 직원에 의한 집단 구타당함
1993년 4월 이후 정신과 입원 치료(이후 5차례에 걸친 입, 퇴원 과정에서 3차례 자살 기도)
1995년 12월 4일 서울 송파동 송파 사거리에서 분신(전신 80%, 부분 3도 화상)
1995년 12월 14일 10일 간의 투병 끝에 운명
 
학내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정부의 시녀로 전락해버린 학교 당국으로부터 터무니없는 고소, 고발로 같이 활동하던 몇몇 간부들과 같이 성남 경찰서에 고발당했다. 제자를 고소, 고발한 교수들에게 심한 정신적 상처를 입고 갈등하던 동지는 구속영장이 발부돼지 않았으나 당시 성남 경찰서장과 담당 경찰관들은 직무를 남용하여 48시간 이상 구금했고 가혹행위 등 고문수사를 해 정신적 충격을 받게 했다. 재판에서 징역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받고 수감 3개월 만에 석방됐으나 ’93년 3월 부정입시관련 비상학생총회 중 교수, 직원에 의한 집단 구타를 당해 육체적·정식적으로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이후 정신적 충격으로 몇 차례 자살을 기도했고, 결국 ’95년 12월 4일 온몸으로 학내민주화를 위한 삶의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조현식

 
  (1964년~1998년)   당시 34세 노동열사
 
1965년 서울 출생
1984년 한국외국어대 용인캠퍼스 입학
1990년 한국외국어대 학회연합 회장
1993년 경기도 광주 노동법률상담소 조직국장
1997년 경기도 광주 ‘일하는 사람들’ 회장
‘한국노동운동협의회’ 운영위원
‘민주주의민족통일하남광주연합’ 사무국장
1998년 경기도 광주지역 건설일용노동조합 초대위원장
민주주의민족통일경기동부연합 정책위원
1998년 12월 25일 경기도 광주지역 건설일용노동조합 사무실에서 화재 발생, 화상입음
28일 운명
 
동지는 ’97년 IMF사태로 극심한 실업의 고통에 처한 건설일용노동자들의 권리와 생존권을 보장받기 위해서 경기도 광주지역에 건설일용노동조합의 초대위원장을 역임해 건설노동자들을 위해 노력했다. 또한 조합원들을 조직하기 위해 새벽 인력시장 등을 찾아다니며 설득과 조직화를 위해 동분서주했고 조합원들과 함께 체불임금해결과 노동조건개선을 위해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기도 했다. 동지는 조합원들의 먹고살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던 중 마침내 산림청과의 협상에 성공하여 숲 가꾸기 사업에 노동조합의 참여를 보장받았다.12월 25일, 모든 사람들이 성탄절로 들떠 있던 당일, 조합간부들과 숲 가꾸기 사업설명회를 준비하던 중 사무실에 원인불명의 화재가 발생해 병원에 입원 증 운명했다.

 

 

 

 

박상윤  
  (1967년~2004년)   당시 36세 노동열사
 
1968년 서울 출생
1987년 6월항쟁 관련 시위로 구속
1988년 남북공동올림픽개최요구 시위로 구속
1992년 한국빠이롯트만년필 입사, 노민추 활동
1995년 대명정밀 입사
1996년 노동자생활문화공동체 '모듬살이' 회장
1996년 광명인쇄 입사, 인쇄노조 가입
1997년 민주노총 서울본부 중동부지구협 사무차장
1998년 민주노동당 가입, 당원번호 61번
1998년 민주노총 서울본부 조직부장
2000년 민주노총 서울본부 조직국장
2002년 민주노총 서울본부 사무처장
2004년 12월 30일 운명
 
’87년 20살 나이에 6월항쟁 관련 시위로 구속되면서 이후 노동운동에 들어서게 됐다. ’88년 남북공동올림픽개최요구 시위로 두 번째 구속이 됐고, ’92년부터는 한국빠이롯트만년필에 입사하여 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 활동을 전개했다. ’99년부터 본격화된 비정규·미조직 노동자 조직과 투쟁을 통해 상용직, 재능교사, 학습지, 보험모집인, 서울대시설관리, 한국통신계약직, 방송사비정규, 동부시장, 서울지역중소기업일반노조, 덤프연대 등 수많은 미조직·비정규노동자들의 조직과 투쟁에 헌신했다. ’02년 민주노총 서울본부 사무처장에 출마해 당선됐다. 이후 ’04년 12월 30일 운명하게 될 때까지 쉼 없는 활동으로 인해 5년째 내리 건강악화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몸을 돌보지 못했다.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에서 사람을 중심에 놓지 않고 분열하는 모습을 참으로 안타까워했다. 이렇듯 자신을 돌보지 않고 운동에 헌신하던 동지는 참으로 따뜻한 사람이었다.